Fogeaters, Light The World.

04

2015-Nov

[수필, 스크랩] 헬조선의 청년에게

작성자: Blonix IP ADRESS: *.132.118.121 조회 수: 147

헬조선의 청년에게

 


헬조선. 대충은 짐작하겠는데 그래도 뭔가 싶어 검색을 해봤다. 희망 잃은 젊은 세대의 자학적 신조어, 청년세대의 상실감이 만든 온라인 언어란다. 실업, 경제적 불평등, 정부에 대한 불신, 일상의 부조리와 모순들로 청년들에겐 우리 사회가 지옥과도 같은 나라라는 것이다. 그대들은 우리 사회를 부모의 능력에 따라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똥수저로 다섯 계급으로 나누어 놓았으며, ‘죽창을 달라고 한다. 평등하게 너 죽고 나 죽게. 아니면 헬조선을 탈출하기 위해 이민을 꿈꾼다. 깊은 절망감에서 나온 지독한 표현들이다.


현실을 비틀고 풍자하는 게 온라인 언어의 특성이다. 그런 면에서 자극적이고 과장된 이런 종류의 조어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온라인의 익명성 뒤에 숨어서 함부로 내뱉어 버린 단어들 일수도 있다. 그러나 가벼이 넘기기엔 이 단어들이 너무 섬찟하고 자기비하적이며, 나 같은 꼰대에겐 불편감을 넘어 모욕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그래서 많은 꼰대들이 이 섬뜩한 표현을 정색을 하고 대하기 시작했다.


그래, 힘이 들게다. 청년실업이 100만이 넘는다는데 하루하루가 고단하지 않는 청춘이 어디 있겠으며, 수준도 안되는 금수저가 부모 덕분에 흙수저, 똥수저에게 갑질하는 세상에 무슨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겠나. 계층이동, 신분상승의 사다리가 사라져버린 사회에서 노력이 아니라 그대들의 말대로 노오오오력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래서 자포자기하고 체념해버린 그대들의 절규로 들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처한 부조리한 현실은 부모 잘못 만난 탓이요,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지 못한 기성세대의 잘못이다. 아무리 열심히 스펙을 쌓고 공을 들인다고 해도 계층이동의 가능성이 보이질 않는다. 빈익빈 부익부의 악순환은 깊어지고 청년의 미래는 암담해 보이기만 한다.


그렇다. 기성세대의 잘못이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에 낀 조그만 반도 땅에서 태어난 내 할아버지 조상의 죄가 제일 크고, 그 땅도 지키지 못해 식민지 지배를 당했고, 자주적인 독립을 쟁취하지도 못했으며, 친일청산도 제대로 못했고, 참혹한 전쟁을 벌여 다른 나라 군대까지 끌어들였던 내 부모 세대들의 잘못이 두 번째다. 그들의 잘못으로 이 나라가 자본주의 세계질서에 편입되었고 친일파가 득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 사회를 부패와 불의의 지옥으로 만들었으며, 지금의 청년세대가 신자유주의의 정글 속에 내던져지게 만들었다. 친일잔재와 외세를 청산하지 못해 이 나라를 재벌과 부패집단의 사냥터로 놀이터로 만들고 말았다. 지금은 꼰대가 돼버린 나의 죄도 가볍지만은 않다. 어쩌면 가장 큰 잘못은 우리 세대의 몫일 지도 모른다. 내 할아버지 조상의 태생의 죄는 그들의 탓이 아니다. 태어날 곳을 선택할 수 없는 노릇이니 그들에게 원망은 몰라도 죄를 물을 수는 없다. 내 부모세대의 잘못을 따지기에는 그들이 너무 불쌍하다. 아니 그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그들의 잘못은 현명하지 못했던 내 할아버지 조상을 부모로 만난 게 전부다. 왕후까지 왜인 깡패에게 난자당한 진짜 헬조선 식민지에서 끌려다니고 능욕을 당한 내 부모들이다.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 헬로오케이만으로 살아남아야 했던 그들이다. 힘이 있었다면 자주독립을 쟁취했으리라. 친일잔재도 가혹하게 청산하고 당당하고 빛나는 나라를 건설했겠지. 지금의 헬조선 청년이 자랑스러워 할 멋진 나라를 남겨주고픈 꿈이 그들에겐 왜 없었을까. 냉전의 세계질서를 거스르기엔 내 부모세대의 힘이 너무 미약했을 뿐이다.


내 부모들은 이 실날같이 남은 마지막 힘을 내 세대를 위해 다 썼다. PL 480으로 들어온 원조 밀가루로 나를 먹이고, 그 푸대로 옷을 지어 입혔다. 콜타르 먹인 루핑 지붕의 판잣집 교실에서 악착같이 우리를 가르쳤다. 글과 셈을 배우게 하고 ABCD를 가르쳤다. 그래서 첫째 누이는 초등학교, 둘째는 고등학교, 나는 대학까지 보냈다. 내 부모세대에게 더 이상을 바란다면 그건 정말 아니다. 그들이 전쟁의 폐허에서 배곯지 않는 나라의 기초를 닦았고 훌륭히 자녀세대를 양육해냈다. 그들의 시대적 소명은 거기까지다.


그 다음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었다. 우리의 죄도 여기서 부터다. 고도성장의 욕심에 가려 그늘을 보지 못했다. ‘SONY’같이 번듯한 공장 하나 가져보는 게 나라의 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절차와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 지상주의에 매몰됐다. 재벌을 용인했고 부정과 부패, 협잡도 쉽게 허용했다. 돈벌이만 된다면 반칙도 쉽게 생각하며 살았다. 너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과정은 없고 결과만 봤던 외눈박이였다. 헬조선의 청년이 극혐해 마지않는 지금의 불평등과 부정부패, 천민자본주의가 만연하게 만들었다. 성장지상주의 사회에 개인은 없었다. 전체만 존재했다. 외국 지도자가 방문하면 거리로 불려나가 그 나라 국기를 흔들어야 했고, 식민지배의 유산으로 남겨진 교복 위에 구호가 적힌 리본을 주렁주렁 달고 살았다. 국민의 주권은 소수의 직업군인에 의해 유린되었고 국민은 무시당했다. 헌법을 고치자고 말하면 감옥을 가거나 고문실로 끌려갔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국민을 무시하고, 고문하고 죽이는 이 더러운 독재권력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 않으려 진짜 헬조선의 청년들은 눈물과 피와 목숨을 내놓았다. 어머니의 가슴을 찢어놓으면서 바리케이트 앞에서 독재권력과 맞섰다. 내 나라 군대의 총검에 베이고 목숨을 잃었다. 내 아이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진짜 헬조선에 살지 않도록 하기위해 그랬다. 지금은 꼰대가 된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갇히고 또 죽었다. 국민이 대통령을 뽑고 국민을 무시하지 않는 정부를 만들어 낼 때까지 그리했다.


'꼰대'의 변명이지만 시대마다 결정적 과업이 있는 법이다. 내 아버지 세대는 빈곤 탈출의 과업을 훌륭히 수행해냈다. 우리 시대의 과업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지금의 이 나라가 나라다운 나라냐고 물을 수 있다. 부족한 것이 많다.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근대화와 민주화의 과정에 남겨진 과제들이다. 우리 세대가 한 것은 최소한의 것, 가장 기본적인 것 정도다. 아이를 낳아 키우고 가르치는데 부족함이 없는 나라, 국민의 뜻으로 정부를 선택하고 또 바꿀 수 있는 나라. 이 정도다. 더 멋진 나라를 넘겨 줄 수 없어 미안하지만 우리 세대의 역량은 여기까지다. 시간도 부족했다. 다른 세계가 300년 동안 만들어온 모든 것을 나와 내 부모세대가 6,70년 만에 다 해내기에는 재주가 모자랐다.


남은 몫은 그대들의 숙제다. 불평등을 줄이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언제든 일할 수 있고, 턱도 없는 금수저의 갑질도 없고, 안전하고, 국민이 존중받고,‘루저도 보듬고 안아주는 세련된 나라 멋진 나라를 만드는 것이 그대들의 시대적 과업이다.


세련되고 멋진 나라의 모습이 지금은 꿈같아 보이고 턱도 없이 보일 지도 모른다. 기성세대의 기득권이 철벽같이 버티고 선 세상에 무슨 같지도 않은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짧은 인생 속에서 터득한 게 있다. ‘세상은 끝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금수저와 똥수저의 대물림도 언젠가 그 고리가 끊어진다. 내 짐작에는 그대들의 시대에 반드시 그리 된다. 부족한 우리 세대가 재벌 3세 상속을 허용했지만 4, 5세 상속이 영원토록 가능하리라 믿지 않는다. 그대들이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넘어라. 그래서 기회가 넘치고 사회적 연대감이 충만한 멋있는 나라를 만들라. 헬조선에서 죽창을 준비하는 그대들의 분노가 다음 세대를 위한 열망이라 믿고 싶다.


하종호(월성종합사회복지관장)



출처 - 아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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