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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Feb
인간관계에 대한 고찰작성자: Blonix IP ADRESS: *.148.87.98 조회 수: 306
사람은 누구나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신념이라는 것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애매모호한 것일지라도 그 존재에 대해서 부정할 수는 없다. 신념은 한 사람의 정체성이다. 그 정체성은 나라는 존재를 타인과 분리해 규정하게 해주며 삶을 대하는 태도와 행동방식, 나아가 가치관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친다.
인간관계를 결정하는 것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해관계이다. 무엇이 나에게 이득이 되고 무엇이 나에게 손해가 되는가. 저 사람은 나에게 이득을 가져다주는가, 손해를 가져다주는가. 그것은 인관관계에 있어 아주 절대적인 것이다. 물론 사람은 언제나 감정적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해관계는 단순히 물질적, 금전적인 이해관계의 범위가 아니라 감정적인 범위의 이해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즉, 어떤 사람이 나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는 것은 감정적인 이득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이득과 손해는 단순히 일차원적으로 지금 현재에만 종속되지 않으며 미래에 대한 기대 역시도 포함한다.
당연히 이러한 이해관계는 단 두 사람 사이에서도 엄청나게 복잡하게 얽혀있다. 감정적인 득실과 물질적인 득실이 엉키고 엉켜 최종적으로 나에게 이 사람이 이득인지 손해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리고 좀 더 예외적인 경우로 득실을 떠나 타인이 자신의 신념 그 자체와 얽혀 꼬이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천천히 논하도록 하자.
우선, 타인과 나의 이해관계가 지금 현재 일치하는, 즉 서로가 판단하기를 상대방이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경우이다. 나는 이 상태를 ‘동료’ 라고 정의한다. 이 상태는 신념이 완전히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념이 서로 상이할지라도 현재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때, 누구든지 동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상황이 바뀌어 이해관계가 틀어지면 동료의 관계는 언제든지 끝날 수 있다.
다음은 타인과 나의 이해관계가 지금 현재 충돌하는, 서로가 판단하기를 상대방이 자신에게 실이 되는 경우이다. 나는 이 상태를 ‘적’ 이라고 정의한다. ‘동료’의 정의와 마찬가지로 이 상태 역시 언제든지 끝나고 ‘동료’로 돌아설 수 있다.
타인과 나의 이해관계가 서로 어긋나는 경우는 인간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 나는 상대방이 나에게 득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은 내가 실이라고 생각하는 경우, 혹은 그 반대의 경우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대방은 동료도 아니고 적도 아닌, 그저 타인이다. 물론 여기서 각자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동료가 될 수도, 적이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이러한 득과 실의 판단은 아주 주관적인 문제다. 내가 판단하기를 상대방이 나에게 있어서 이득이 되는 경우이지만 상대에게 있어 내가 이득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나는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인 것처럼 포장해 상대방을 속일 수도 있다. 이렇게 속이는데 성공해 상대방이 나를 이득이라 판단하게 될 경우, 이 역시 동료의 관계가 성립한다. 다만 한쪽이 상대방을 언제든지 버림패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뢰도가 낮은, 매우 불안정한 동료관계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관계는 언제나 동료 혹은 적으로 구분되는가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사람 사이의 이해관계에서 득실의 판단은 가치관에서 비롯되며 그 가치관은 각 개인의 신념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신념, 다시말해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포함되는 것이다.
개인의 신념을 구성하는 요소는 아주 다양하며 각각 그 비중을 가지고 있는데, 이 신념 속에서 어떤 한 사람이 얼마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기준으로 인간관계를 규정해 볼 수 있겠다.
나는 내 신념의 요소, 즉 내 정체성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사람을 ‘친구’ 라고 정의한다. 이들은 나의 신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 신념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내 가치관, 나이가 이해관계에 대한 판단 그 자체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그 영향이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것에 긍정적인 영향인지 부정적인 영향인지는 상황에 따라서 다르다. 이러한 정의를 따르면 사실상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은 나와 친구인 셈이다. 그 친구가 동료인지 적인지에 관계없이 말이다.
나에게 있어 얼마나 친한 친구인지는 내 신념과 정체성에서 상대방이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구분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에서 다소 특별한 지점을 고려할 수 있다. 바로 내 정체성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사람이 존재할 경우이다. 나는 이러한 사람을 ‘연인’ 이라고 정의한다. 연인은 나의 다른 모든 신념보다 무겁다. 나의 정체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 연인이 동료인지 적인지는 관계가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인물에게 복수를 한다는 그 일념만으로 살아왔다면, 그 인물은 나의 정체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인물인 것이다. 그가 없으면 나도 없다. 그야말로 개같은 숙적으로서의 연인인 셈이다.
여기서 내가 친구와 연인을 구분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위에서 내린 정의에 따르면 친구 혹은 연인은 나의 동료일수도, 적일수도 있다. 하지만 친구의 경우 나의 동료인지 적인지는 상황에 따라 아주 쉽게 바뀔 수 있다. 나의 다른 중요한 신념과 친구가 정면으로 충돌할 경우에 나는 나의 중요한 신념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해관계는 필연적으로 충돌할 것이고 서로 적이 될 것이다. 하지만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여전히 친구의 관계는 유지될 수 있다.
그런데 연인은 다르다. 다른 모든 신념보다 상대방이 무겁다면, 내 다른 신념과 상대방이 정면으로 충돌할 경우에도 나는 상대방을 선택할 것이다. 즉, 연인으로서 굳어진 동료, 혹은 적의 관계는 매우 변하기 어렵다.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뀔만한 커다란 사건으로 인해 개인의 신념과 정체성이 완전히 재편성되지 않는 한, 끝까지 유지될 것이다.
요약하자면 내가 바라보는 인간관계는 적인가 동료인가, 그리고 친구인가 연인인가, 아니면 그저 아무 관계없는 타인인가. 그 뿐이다. 이 글은 전적으로 나 개인의 생각일 뿐이며 찬성과 동의를 구하는 글이 아님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