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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Mar
버트란드 러셀 - '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가' 발췌작성자: 츠바이 IP ADRESS: *.81.163.98 조회 수: 336
종교가 주는 해악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종교에 반드시 주어져야 한다고 여겨지는 믿음의 성질에 좌우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믿어지고 있는 특정 신조들에 좌우되는 것이다.
우선 믿음의 성질에 관해 살펴보자. 여기서는, 신앙을 갖는 것, 다시 말해 반대 증거가 있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는 것이 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아니, 반대 증거로 인해 의심이 생기면 그 증거들을 억압해야 한다고 주장된다. 이러한 근거 위에서, 러시아의 경우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주장을 못 듣도록, 미국의 경우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주장을 못 듣도록 젊은이들의 귀를 막아버린다. 그 결과 양측의 신념이 원상 그대로 보존되면서 사생결단식의 전쟁만 준비될 뿐이다.
비록 자유로운 탐구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는 믿음이라 하더라도 이것 혹은 저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식의 확신은 거의 모든 종교들에서 볼 수 있는 현상으로서 바로 이것이 국가교육제도를 자극해 댄다. 그 결과 젊은이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자신들과 다른 광신주의를 가진 상대편에 대해 광적인 적대감으로 가득 차게 되며, 특히 모든 종류의 광신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더한층 적의를 가지게 된다. 증거에 입각해 확신하는 습관, 증거가 확실하게 보장하는 정도까지만 확신하는 습관이 일반화된다면 현재 세계가 앓고 있는 질환의 대부분이 치유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그러한 습관의 형성을 방해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로 되어 있으며, 근거 없는 독단 체계를 믿지 않겠노라고 하는 사람들은 2세를 가르칠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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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은 좋은 것이고 다른 신앙은 해로운 것이라고 한다.
또한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에 대해서도 그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모든 신앙은 해롭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을 증거가 없는 어떤 것에 대한 확실한 신뢰로 정의할 수 있다.
증거가 있을 때는 아무도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2더하기 2는 4, 혹은 지구는 둥글다를 신앙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 감정으로서 증거를 대신하고 싶을 때만 신앙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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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안이하게 만들어 주는 꾸며 낸 이야기의 도움 없이는 삶의 위험을 정면으로 대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연약하고 상당히 비열한 면이 숨어 있다.
그의 어떤 부분은 거의 필연적으로 그것이 꾸며 낸 이야기에 불과하며, 그것을 믿는 이유는 단지 편안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감히 이런 생각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한다!! 게다가 희미하게나마 스스로의 의견이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이 논박 당하면 굉장히 화를 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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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곤 한다. 즉, ‘당신의 냉정한 합리주의가 독단적 신앙으로 보호되고 있는 아늑한 가정 같은 편안함과 비교될 수 있는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양하다. 우선 나는 이성의 포기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은 큰 행복은 줄 수 없다고 말한다. 또 나는 술이나 마약 또는 과부나 고아의 돈을 사취함으로써 모은 재산 등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은 큰 행복을 줄 수도 없다고 말한다.
나의 관심은 개인의 행복이 아니라 인류의 행복이다.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인류의 행복을 원한다면 어떤 형태의 사소한 개인적 행복도 당신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아이가 병에 걸렸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당신이 세심한 부모 라면 아무리 의심스럽고 비관적이라 해도 의사의 처방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돌팔이 의사의 기분 좋은 의견을 받아들여 결과적으로 당신 아이가 죽었다면 돌팔이 의사에 대한 믿음의 유쾌함이 당신을 용서해 주지는 않는다.
사람이 그 어떤 외부의 것도 믿지 않고 홀로 모든 일들을 책임지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일까?
그것이 종교든, 국가든, 책이든, 부모든, 친구든, 모종의 가치든...
내가 오로지 나만을 위해 산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만약 내가 '어떠한 것'을 위하여 산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 '어떠한 것'에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삶의 책임을 일부 전가한다고 볼 수 있지.
종교를 광신적으로 믿고 그것을 위해 사는 삶과, 자신의 모든 여생을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부모의 삶은 어찌보면 본질적으로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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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볼만한 좋은 글이므로 약 1주일 뒤 도서관으로 이전하겠음
Elysium - 왜 나는 기독교인인가.
본인은 기독교인이다. 매우 신실한 기독교인이라서, 매주 교회도 '나갔다.'
지금은 안나가지만, 그럼에도 매우 미친듯이 기독교인이다.
기독교적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맹목적인 믿음과 감정을 가지고도 다른 믿음과 신앙을 보고, 그들과 공존하려 하는 나는,
비로소 진정한 기독교인이다.
모든 종교가 말하는 것은 같다.
제대로 안살면 사후에 개고생 할꺼야 라는 협박.
말하자면 사람들을 사회의 부품으로 제대로 기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과거 사회의 잔재.
그보다 편한 것이 어디 있었을까. 부족장에게 대들 때마다, '너 그러면 활활 불타는 곳에 버려져서 평생 발바닥이 불타며 살꺼야.' 라는 단순한 협박으로 매우 순종적인 노동력으로 만들었을 테니까.
나는 현대사회를 산다.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누군가는, 기독교 신자로서의 나와 큰 차이가 없다.
아직은 현대사회의 다원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미성숙한 종교들과도 같이, 사람들은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있고, 그에 반하는 경우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한다.
내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럼에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행위들이나, 신념을 공유하지 않는 것도ㅡ 모두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증거가 없는 것에 대한 신뢰.
진실로 옳다. 그것은 신앙에 대한 완벽한 정의이다.
그렇다면 나의 사고의 증거는 무엇인가.
나의 감정의 증거는 무엇인가.
현재의 나의 증거는 무엇인가.
이 모든 것이 신앙인 것이고, 오컬트인 것이고, 또한 현실인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기독교도이다.
나는 생각하고, 느끼고, 살기 때문에.
배울 것이 끝도 없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