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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Dec
[스크랩]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작성자: 츠바이 IP ADRESS: *.26.130.26 조회 수: 300
레비 스트로스는 구조주의란 우리가 생각지 못한 조화에 대한 탐구이며, 어떤 대상들 가운데 내재하고 있는 관계의 체계를 발견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레비 스트로스는 친족체계 내의 혼인법칙을 호혜성에 의한 교환의 체계로 설명한다.
문화에 대한 그의 이미지는 하나의 구문으로 표현될 수 있는데, 이 구문의 이해를 통하여 우리는 특정한 의식, 교환, 신화 등의 인간행위를 음운으로써 분석할 수 있다. 이같은 분석은 서로 다른 종류의, 혹은 서로 모순적인 요소들의 진실한 상호관계를 나타내준다. 구조언어학의 경우처럼, 레비 스트로스의 인류학은 사회현상의 각 요소는 오직 내재적인 체계의 수준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간주한다. 따라서 그는 모든 문화를 하나의 의사전달부호로 간주하고, 모든 사회과정을 하나의 문법으로서 취급한다.
그의 연구과정은 최종적 체계화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정신적 구속에 관한 "목록작성", 임의성을 하나의 "질서로 환원"시키려는 시도, 자유의 환상에 내재하는 어떤 "필연성"을 발견하려는 탐구로서 간주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이다.
근친금혼의 원인에 대해서는 유전적인 악화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모건 식의 생물학적 해석과 친족체계의 위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웨스터마크 식의 도덕적 혹은 심리학적 해석이 있다. 그러나 레비 스트로스는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친족체계의 기능은 남녀의 성적 결합이나 위계질서의 유지라는 면보다는 한 집단이 근침금혼에 의하여 사회적(보다 구체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사회적 이익이란 경제생활에 있어 재화와 용역의 순환과 유사한 '여자의 자유로운 순환'이 발생된다는 것이다. 집단들은 여자를 집단 간에 교환할 수 있는 기호로서 간주하여, 이 기호들을 교환함으로써 서로가 공통적인 유대와 협력관계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와 같이 근친금혼을 결혼제도에서 호혜성의 원칙이라는 교환구조에 의해서 설명한다(교환에 관한 그의 이론은 모스의 영향을 받았다).
레비 스트로스는 정신이 가장 자유롭게 그 자체의 구조적 자발성을 발휘할 수 있음직한 신화학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신화의 분석에서도 그의 궁극적 관심은 표면적인 현실의 무의식적 심층구조를 밝혀내어, 모든 인간정신에 보편적으로 타당한 사고형성의 원칙들을 발견하려 한다.
레비 스트로스에게서 신화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자연현상의 설명에 관련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의 이론적 질서를 지닌 사실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연현상을 사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화란 인간정신의 구조 속에 이미 존재하는 세계에 관한 하나의 영상이다.
하나의 복합체계 내의 모든 요소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그것들의 의미는 그 단위가 나머지 부분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그들의 상호관계에 관한 분석으로부터 파생될 수 있다는 언어학적 과정에서 출발하여, 레비 스트로스는 본질적으로 상이한 수백 가지의 신화들을 하나의 동일한 유형에 짜맞추었다.
신화가 하나의 언어이며, 또 구조주의가 언어학에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바로 그 사실만으로써 레미 스트로스의 구조적 분석이 타당성을 지닌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신화란 언어 그 자체도 아니며, 단지 그것은 언어와 비슷한 성격을 지녔을 뿐이다. 내용에 형식을 부여하는 정신의 활동은 근본적으로 고대나 현대에 걸쳐 모든 정신에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현대의 과학적 사고와 선사 시대의 신화적 사고 간에 아무런 질적 차이를 두지 않는 그의 기본적 입장에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의 신화적 구조의 성격에대한 놀라운 분석은 분명히 오늘날 상직주의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에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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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픈 열대>의 내용
그는 경험이 현실을 포괄하여 현실을 설명한다는 점은 기꺼이 동의해도, 우리가 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험을 포기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레비 스트로스는 실존주의가 주체성이라는 환상에 빠져들어 사적인 선입관들을 철학적 문제의 영역으로 확대하려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철학자의 과업은 존재를 즉자의 관계에서 이해하려는 것이지 대자의 관계에서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현상학과 실존주의는형이상학을 없애지 않고, 형이상학을 위한 이증을 발결하려는 새로운 방식을 단지 이끌어낼 뿐이라고 하였다.
그의 현지조사가 전개되어감에 따라, 루소에 대한 레비 스트로스의 존경심은 더욱 커져갔다. 레비 스트로스의 생각에 의하면, 루소는 우리들로 하여금 대부분의 인간사회에 공통적인 특성들을 구분해냄으로써 우리들의 미래의 연구방향을 제시해줄 '어떤 (존재하지 않는) 사회상태'에 관한 모델을 설정하도록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루소나 레비 스트로스는 이와 같은 모델에 가장 접근하는 사회는 이른바 '신석기 시대'라고 생각한다.
레비 스트로스는 서구사회가 세계의 다른 나머지 부분에 대해 그 자체의 기준을 부여하려는 오만하고도 잘못된 전통에 대해서 반대한다. 그는 이들 원주민 사회가 야만적이라거나 비합리적이라는 전통적 사고를 반박하며, 이른바 미개사회는 인간성에 관한 전체적 체험을 거의 완전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이 사회는 오직 우리들의 사회와는 다른 종류의 사회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세상에는 더 우월한 사회란 없다는 것이다. 현재의 서구사회가 기술적으로는 이들 원주민 미개사회보다 더 우월할지 모르나, 그것이 정신적인 면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우열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현재 서구인들의 사회처럼 진보적이며, 업적을 중요시하는 사회를 '과열된 혹은 동적 사회'라고 부르며, 종합의 재능과 인간적 교환의 가능성이 반복적으로 지속되는 사회를 '냉각된 혹은 정적 사회'라고 부른다. 냉각된 사회는 기술적 진보에서 하나의 척도가 되는 개인당 에너지의 양을 거의 증가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계적이다. 이 사회는 원초적 상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고, 또 기록된 전통이나 (우리들이 사용하는 의미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또 이 사회들은 매우 민주적이며, 거기에는 위계의 서열에 의한 인간적 파괴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한편 '과열된 사회'는 열역학적이다. 왜냐하면 이 사회는 하나의 스팀엔진처럼 에너지를 산출하고 소비하면서 갈등을 통해 발전하여 왔고, 기술적 비약을 이룩해 왔다.따라서 우리들이 진보라는 것을 개인당 가용 에너지의 양에 의하여 측정한다면 서구사회가 훨씬 진보한 사회이겠지만, 만약 그 기준이 불리한 지리적 조건을 극복함에 있어서의 성공에 주어진다면 에스키모족이 첫째일 수도 있고, 만약 진보라는 것이 가족 및 사회집단의 조화로운 유지에 있는 것이라면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떤 원주민 사회가 가장 으뜸이 될 수도 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인류학적 연구를 통하여 우리들 자신의 사회와는 다른 사회에 대해 편견이 아닌 객관적 관점을 지니게 되고, 나아가 우리들의 사회가 지닌 관습들의 정당성이나 자연스러움을 당여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비판적응로 파악할 수 있는 관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레비 스트로스는 현대문명사회에 대하여 자기 세대의 다른 지적 동료들과는 다른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의 기본적 입장은 진보에 대한 단순한 반대론자를 벗어나서 불교의 영향을 받은 듯한 일종의 용인과 우주론적 체념을 지니고 있다. 그는 진보가 수반하는 문화적 기형과 추악함을 경계하면서, 그의 세계관을 인간의 욕구나 고난이 감소되는 어떤 종류의 변화를 추구하게 한다. 레비 스트로스는 진보의 절대성이 그 작용을 멈추고, 기계가 사회적 개선의 과제를 떠맡아 '과열된 사회'와 '냉각된 사회'의 특징들이 단계적으로 융합되어서, 적어도 진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노예화시켰던 구시대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성이 해방되는 먼 후일의 시대를 동경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레비 스트로스의 탐구의 목적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 해답은 루소가 ㅁ라한 다음과 같은 상태, 즉 '이미 존재하지 않고, 과거에도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미래에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어떤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려고 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타에 있는 사회란 어떤 안정된 전체감을 인간에게 제공하며, 인간은 슬픔을 축제에 의해 해결할 수 있고, 인간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영혼의 지배력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황금시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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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스트로스는 원시인(미개사회의 원주민)의 사고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거나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원시인들도 고도의 복합적인 형식으로 사고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논리란 단지 서구인들에게 익숙한 추상과학의 논리와는 다른 종류의 질서를 지녔을 뿐이다. 현대의 과학적 사고가 하나의 단일한 부호(code)를 추구하는 데 반하여, 야생의 사고는 그 자체를 계속하여 집단화하고, 많은 불연속적 요소들을 단순화시키지 않은 채로 경험세계의 자료들을 재정리하는 하나의 의미론적 체계이다. 예컨데 미개인의 사고세계에서 주술 또한 그 자체의 논리를 지니고 있다. 주술은 추상적인 과학적 사고와는 달리 하나의 '완전한 결정주의'를 가정하는 것이다. 이 결정주의적 원칙들은 전통적인 지식의 조각들을 근본적으로 동일한 구조적 유형의 무한한 변수로 확대시키는 것이다.
아무튼 레비 스트로스는 원시적 사고란 동식물의 세계를 민감하게 이해하고, 우주적 조화를 구축하려는 감각 속에서는 균형과 연속성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과학적 논리와는 다른, 어떤 지식 획득의 방식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레비 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의 특징을 "무시간성"에서 발견한다. 왜냐하면 야생의 사고의 목적은 세계를 하나의 통시적, 공시적 전체로 파악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레비 스트로스의 관점은 그가 역사적인 진보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비난을 불러 일으켰다. 왜냐하면 레비 스트로스의 역사의식에 따른다면, 인류역사의 전 과정은 하나의 동일선상에서 유지되어온 의미나 지식의 축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각 시대와 공간적 특성에 따라, 동일한 구조가 다양하게 변모하였을 뿐인 것이다. 물론 그는 진보의 개념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결코 지니지 않았다. 단지 그는 진보란 인간발달의 차원에 대한 하나의 범주로서, 어떤 사회가 자기 인식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언제든지 다른 차원으로 이전되어 버리는 동일한 구조 내의 불연속적 다양화일 뿐이라고 간주한다.
레비 스트로스는 하나의 역사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역사가 존재하고, 또 이들 각각의 역사는 철학자나 역사가가 부여하는 의미와는 상관없이 그들 자체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들 자신의 사회척도에서는 진실된 의미를 지닌다고 간주할 수 있는 사실도, 인간성의 척도라는 면에서는 절실한 것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구조적 변형들을 수세기에 걸쳐서 통시적으로 기록하나 인류학은 그것들을 공간을 초월하여 공시적으로 기록한다. 통시적 변형의 명확성은 공시적 변형의 명확성보다 더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인류학적 다양성의 공시성은 야생의 사고 그 자체의 특성과 일치하는 것이다. 야생의 사고는 어떤 진실을 하나의 전체 가운데서 중복되고 있는 많은 부분적 양상들을 총화시킴으로써 표현한다. 반면에 여가는 연속성에 대한 관심으로 인하여 전체성을 희생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역사학자는 (사라진 과거의 사회가 현재의 사회와 관련되는 어떤 시점에 있는 것처럼) 사라진 사회의 모습을 재구성하려는 반면에, 인류학자는 시간적으로 이미 사라진 사회의 기존형태보다도 선행하였던 역사적 단계를 재구성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에게서 역사란 시간상으로 펼쳐진 인간의식의 조합과정으로서, 인간정신의 구조적 변형만을 보여줄 따름이다.
구조주의는 생생한 현실을 거부하는 한편, 현실로부터의 해방을 열렬히 추구한다. 또 레비 스트로스는 인간과 인간의 역사는 화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기계적 요소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유물론자의 어조를 지니는가 하면, 인간과 인간의 역사는 정신의 일정한 구조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함으로써 한 사람의 관념론자처럼 이야기한다. 또한 구조주의는 비정치적 태도를 취하려고 하지만, 기득권을 옹호하고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표현하고 있다. 구조주의가 지닌 이 모든 비일관성은 구조주의가 감소시키고 불신하려는 바로 이 회피할 수 없는 현실 가운데서 증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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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쟁점
비평가들은 그가 매우 적은 현지조사의 경험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론에 적합하도록 자료들을 선택했기 때문에, 만약 다른 자료를 사용한다면 그의 주제가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자료수집의 선택성을 지적한다.
어떤 비평가들은 레비 스트로스가 모든 사회적 활동들을 인간 정신의 기계적 요소로 환원시키려고 시도한다고 한다. 그들은 레비 스트로스가 인간을 응결, 압축시켜서 생활과 현실로부터 분리시키며, 자신의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개인으로 보는 대신에 하나의 형식적 체계의 창조물로서, 그의 생활은 일정한 구조들에 지배받고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앙리 르페브르와 같은 비평가는 구조주의가 내포하는 역사적 발전에 대한 무관심은 기존의 정치적 지위에 대한 반혁명적 방어라는 점에서 하나의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도구라고 비난한다.
구조주의에는 두개의 야심이 함축되어 있다. 인간과학과, 인간의 행위는 정신과정의 구속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느 것이다. 그리하여 구조주의는 자연과학자가 수학적 논리로써 자연현상을 이해하듯이 구조적 논리로써 문화현상을 이해하려 한다. 사실 수학적 연구와 구조적 연구는 둘 다 기호논리라는 점에서 구조적 논리를 일종의 수학적 논리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수학적 논리에 사용되는 상징들은 감정적으로는 중립적인 반면에 구조적 연구에 사용되는 상징들은 사회적 가치에 의해 침투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고려하면, 레비 스트로스의 측정이 그가 제시하려는 것보다는 훨씬 덜 정확할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인간정신의 무의식의 구조적 측면을 통해서 인간정신에 도달하려고 하는데, 그의 접근방식은 언어학의 방법을 통한 것이었다. 그러나 레비 스트로스가 채택하고 있는 언어학적 모델은 오늘날 대부분 낡고 부적합한 것으로 비판받고 있다.
만약 인간이 레비 스트로스의 입장처럼 행위에 책임을 지는 자유로운 정신 대신에 구조라고 불리는 계획된 회로에 따르는 존재라고 한다면, 구조주의는 모든 전통적인 휴머니즘을 위협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언어학과 구조주의적 연구들이 아마도 현대의 가장 완전하고도 엄격한 무신론을 설립할지도 모른다"라는 장 라크루아의 표현처럼 과학적 구조주의를 극단으로까지 밀고 간다면, 인간사회의 여러 현상의 배후에는 그것을 지배하는 어떤 법칙이 존재할 것인즉, 인간의 자유의지는 부정되고 말 것이다.
실존주의가 주장하는 주체의 철학이 구조주의에 의해 그 주체를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구조주의는 반역사적 성격까지 띤다. 이와 같은 면에서 구조주의는 수사적 철학이나 역사가의 시대에 대한 반발이며, 오늘날 인간에 관한 지식은 거대한 "과학적" 전진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하나의 각성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가 하나의 도덕적 선택이며, 사회적 완전을 추구하는 하나의 입장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레비 스트로스는 원시인들의 사회에 대한 동경과 연민의 정을 느끼는 동시에, 비인간적인 발전이 가속화되고 있는 현대문명에 대해 명백한 분노와 우수를 나타내고 있다.
출처:http://iustitia.tistory.com/entry/%EB%A0%88%EB%B9%84-%EC%8A%A4%ED%8A%B8%EB%A1%9C%EC%8A%A4%EC%9D%98-%EA%B5%AC%EC%A1%B0%EC%A3%BC%EC%9D%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