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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Mar

[스크랩] 인식의 상대주의와 앎

작성자: 츠바이 IP ADRESS: *.81.163.98 조회 수: 291

우리들은 사물 현상 사건에 대해 그것이 어떠어떠하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믿음이 없이는 우리들의 결단·행위 그리고 평가도 불가능하다. 우리들의 믿음이 옳았을 때 그 믿음이 앎이라고 불리워지고 그러한 앎을 진리라고 이름 짓는다.

    불행히도 우리들의 믿음은 사람에 따라, 사회에 따라 그리고 시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와 같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은 언뜻 보아서 우리들의 믿음은 궁극적으로 주관적, 상대적이어서 시간이나 장소를 초월 할 객관적이고 올바른 믿음의 기준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필연적일 수 없다. 우리들의 믿음의 변화와 다양성은 우리들이 올바른 믿음을 아직 찾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지, 올바른 믿음이 없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우리들은 아직도 올바른 믿음, 즉 엄격한 의미로서의 앎을 찾지 못했지만 그러한 앎에 더욱 가까이 감을 시사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우리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아무 것도 알고 있지 않다고 누가 증명할 수 있겠는가?

   올바른 믿음을 앎이라 규정하고 그러한 앎을 진리란 말로 바꿔 놓는다면, 상대주의 진리의 무정부주의에 귀착되며, 이러한 상황에서·진리라는 말은 그 말의 뜻을 잃게 된다. 진리라는 개념 속에는 무정부적이 아닌 어떤 객관성·보편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는 모순된 개념같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앎의 상대주의가 성립할 수 있는가? 또 성립 가능하다면 어떤 뜻에서 그러한가? 모순되지 않는 뜻에서의 앎의 상대주의가 가능한가?

    앎이 어떤 의식 상태를 가리키는 개념임은 자명한 것 같다. 왜냐하면 어떤 주체자를 떠난 앎이란 생각할 수 없고, 그러한 주체자는 의식을 떠나서는 고려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앎이 의식을 두고 말하는 개념이라는 생각은 상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철학자들에 의해서도 의심될 수 없는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되어 왔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이러한 앎에 대한 신념에 금이 간다.

     물론 앎은 의식 상태와 떠날 수 없다. 왜냐하면 앎은 일종의 믿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내가 X에 대해서 X P라고 믿을 때 앎이라는 개념이 성립될 수 있다. X 자체는 물론 P 자체도 앎이 아니다. X는 그냥 사물이요 P는 그냥 X라는 사물의 한 상태 혹은 속성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X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믿음, 즉 내가 X P라고 믿는 것만으로는 앎이 되지 않는다. 나의 믿음이 앎이 되려면 나의 X에 대한 P라는 믿음이 참이어야 한다. X가 참이냐 아니냐가 검증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한 개인의 의식 상태로서의 믿음이 이러한 검토를 치르기 위해서 그것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알 수 있는 형태로 표시될 수 있어야 한다. 바꿔 말해서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나 개인의 사적인 의식 상태로서의 믿음은 사회적인 공적 표현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한다. 공적으로 인지되고 이해될 수 있는 나 개인의 의식 상태의 유일한 표현 매체는 언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개인의 사적인 믿음이 앎으로 공인되고 승격되려면 반드시 언어의 형태, 더 정확히 말해서 진술의 형태를 띠어야만 한다. 나의 X에 대한 믿음이 X P이다 혹은 소나무는 푸르다라는 언어로 표현되었을 때 비로소 그러한 진술의 진위가 검토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앎이란 언뜻 생각할 때와는 달리 언어를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으며,그것은 어떤 개인의 사적인 의식 상태를 가리킨다기보다는 그것과는 독립되어 있는 어떤 언어에 의한 진술을 가리킨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이와 같은 주장에 의하면 앎 혹은 인식은 어떤 한 의식의 주체자가 어떤 사물 현상에 대해 가지는 올바른 믿음이라고 얘기하기보다는,그러한 믿음을 나타내는 언어로써 표현되는 진술 혹은 문장이라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물론 언어가 무엇을 안다 혹은 인식한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엇을 안다는 행위는 오로지 어떤 주체자, 즉 의식을 가졌다고 전제하는 주체자에게만 해당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문제는 방법론적인 데에 있다. 어떤 주체자가 무엇을 알았다고 할 수 있는 근거는 그가 표현한 말, 즉 진술에서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의식의 주체자의 의식 혹은 믿음을 그냥 그대로 알아볼 길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사물 현상에 대한 믿음을 그 믿음에 대한 진술로 돌려 생각할 때, 올바른 믿음으로서의 앎은 곧 어떤 믿음에 대한 올바른 진술이 될 것이다. 앎이란 결국 진리를 두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진리란 올바른 진술에 해당되는 개념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볼 때 앎의 핵심적인 문제는 어떻게 하나의 진술이 옳은가 그른가를 결정하는 문제로 나타나게 된다.

 

 

​  

     〈소나무는 푸르다라는 진술이 옳다는 것은 어떻게 결정될 수 있는가? 어떤 경우에 위와 같은 진술이 옳다, 즉 참이다라고 할 수 있는가? 직관적이며, 가장 상식적이며 또한 플라톤 이후 오늘날까지 철학자들 가운데서 가장 흔들리지 않는 신념에 따르면, 한 진술이 참이냐 아니냐는 그 진술이 그것이 진술하는 대상과 상응 혹은 일치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입장이다.

​      플라톤, 데카르트 그리고 후설은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대표적인 철학자이며, 이런 뜻에서의 진리, 앎을 찾아내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려고 했으며, 오로지 이런 의미에서만 앎의 의미가 있다고 확신했다. 사실과 진실과의 일치, 직관과 그것을 진술한 언어와의 일치에서만 참다운 의미에서의 앎,  객관적이며 보편적이며 따라서 절대적인 인식이 있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

      그러나 위와 같은 의미와는 다른 뜻에서의 앎의 객관성, 즉 객관적 인식의 기초를 마련코자 했던 것은 칸트이다. 그에 의하면 앎의 객관성, 즉 어떤 명제의 옳음은 그것이 하나의 사물 현상 자체, 즉 본질과 일치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인식의 주체로서의 우리들의 의식 구조에서만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의식 구조라는 개념이 애매하다면 그것을 인식 체계 혹은 이른바 개념 체계라는 말로 바꿔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이 하나의 종으로서 다 같이 똑같은 개념 체계 혹은 인식 체계를 가지고 있다면, 그러한 체계에 들어맞는 진술은 논리적으로 보편성, 따라서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전자에 있어서 앎의 객관성을 존재하는 사물 자체에서 찾고자 한다면, 후자의 객관성은 인식하는 주체의 구조 혹은 조건에서 앎의 객관성을 보장코자 한다. 바꿔 말해서 전자의 경우 앎의 객관성을 존재론적 입장에서 본 것인 데 반해서 후자의 경우 그러한 객관성을 인식론적 관점에서 본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 뜻으로서의 객관성이 다 같이 부정될 때 인식의 상대주의가 성립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식에 있어서의 상대주의에 의하면 우리들은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지각하고 그것을 진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물에 대한 보편적인 지각, 그리고 표상을 할 수 없다.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idasbooks&logNo=220610979339&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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